일롱고 지역의 빤싯(출처 = 뿔라우(Pulaw), 위키미디아 커몬즈)
일롱고 지역의 빤싯(출처 = 뿔라우(Pulaw), 위키미디아 커몬즈)

【서울 = 다문화TV뉴스】 현시내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유학 시절에 친구들과 파티를 할 때면 우리는 각자의 부담을 덜기 위해 음식과 음료수, 혹은 간식 같은 걸 각자가 가지고 와서 서로 나눠 먹는 포틀럭(potluck) 파티를 주로 했다.

손이 큰 친구들은 커리를 냄비 한 가득해 오거나, 중국 식당에서 탕수육에 야채볶음을 사오는 친구도 있었다.

이런 파티에 빠지지 않는 파티 메뉴 중 하나가 바로 "빤싯"이었다. 필리핀 친구들이 만들어오는 빤싯은 일단 양이 많았고, 면과 야채와 고기에 벤 양념의 맛이 그리 강하지 않아 흰 쌀밥처럼 다른 요리와 같이 먹기에 적당했다.

물론 빤싯 종류가 정말 다양하기 때문에 필자가 직접 먹어본 빤싯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빤싯이라는 음식이 필리핀 사람들의 삶에서 "조화"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동서양 문화교류의 거점지역이었던 필리핀에서 빤싯문화가 어떻게 시작했고, 또한 필리핀 사람들은 빤싯이라는 요리를 통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는지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빤싯과 빤싯테리아 : 필리핀에서 "빤싯"은 "국수" 혹은 "면"을 통칭하는 용어다. 지금까지 본 동남아시아의 면 요리들 대부분이 광동성 출신의 호키엔(福建人 복건인) 문화에서 비롯되었듯, "빤싯"이라는 용어도 "완자", 혹은 "편의식"이라는 의미를 가진 "편적식(扁的食/ 便的食)"이라는 호키엔 언어에서 유래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이 있는 필리핀인만큼 중국인 이민자들에 의해 전해진 면 문화의 기원은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1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과 필리핀 간의 공식적인 교역은 10세기에 시작했다고 하지만, 비공식적인 교류와 교역은 이미 당나라가 지배했던 7세기부터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듯 오랜 기간 유지해 온 관계와 서로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수입된 상품들이 들어오는 필리핀의 해안 마을에는 중국 무역상의 지부나 출장소가 생기기도 했다.

13세기에 들어오면서 북부의 루손, 남서부의 술루 제도와 민도로 지역을 포함한 필리핀의 거의 모든 지역에 중국 상인들의 선박이 정기적으로 입항했다. 그래서 스페인인들은 중국 상인들을 정기적으로 여행하는 상인이라는 의미로 "상글리(Sangley)"라고 불렀다.

중국 상인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했던 시장은 크게 두 가지 종류였는데 첫 번째가 필리핀 북부의 루손 지역에서 지역주민들에게 중국에서 혹은 세계 방방곡곡에서 들여온 상품들을 판매하는 전통 시장이었다.

중국인들이 가지고 온 고수, 칠리, 레몬그라스, 심황, 새우 페이스트, 땅콩, 파, 간장, 커민, 바질, 아지바인, 타마린드 펄프, 계피, 후추들도 이들 지역시장에서 활발하게 팔렸다.

현시내 박사는 위스콘신 주립대에서 동남아시아 지역학으로 석사, 역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위스콘신주립대-화이트와터에서 조교수를 지냈다. 2020년 9월부터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태국의 냉전 시기 정치사와 국경지대의 소수민족문제, 미국의 냉전 시기 대동남아 정책을 연구해왔고,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글과 강연으로 나누고 있다.
현시내 박사는 위스콘신 주립대에서 동남아시아 지역학으로 석사, 역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위스콘신주립대-화이트와터에서 조교수를 지냈다. 2020년 9월부터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태국의 냉전 시기 정치사와 국경지대의 소수민족문제, 미국의 냉전 시기 대동남아 정책을 연구해왔고,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글과 강연으로 나누고 있다.

또 필리핀어로 "빨라욕"이라고 불리는 중국식 도기 냄비와 요리나 저장을 위한 "방아"라고 불리는 항아리, 웍처럼 생긴 프라이팬, 요리할 때 쓰이는 레인지, 그리고 음식을 만들 때 쓰는 뒤집게 같은 것들도 팔렸다.

또 다른 시장은 스페인 상인과 중개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으로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 팔 중국 상품을 거래하는 곳이었다. 그렇게 필리핀, 특히 루손 지역은 전 세계 무역의 핵심 거점이 되었다.

필리핀만의 빤싯문화는 사실 필리핀과 중국 사이에서 무역을 하던 상인들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스페인의 식민 통치가 시작된 이후에 자리잡았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왕실의 특허를 받은 스페인 회사들이 필리핀에 담배 무역을 독점하고, 공장을 세우면서 이곳에서 일하기 위해 이주한 중국인 노동자들이 빤싯을 먹기 시작한 것이다.

담배 공장에서 일하던 필리핀 노동자들이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다 보니 쌀보다 익히는 시간이나 조리하는 시간이 훨씬 빠른 중국인들의 "편의식"이었던 면 요리가 도입이 된 것이다.

"빤싯"은 처음부터 면 요리만을 가리키는 명칭은 아니었고, 편하고 빨리 조리가 가능한, 그래서 한 끼 식사를 한 접시로 해결할 수 있도록 음식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처음 중국 상인과 노동자들이 필리핀으로 가지고 온 면은 밀면이었지만, 밀재배가 거의 없었던 필리핀에서는 빤싯의 주재료인 면이 쌀가루나 다른 곡물의 전분으로 대체되어 만들어졌다.

그렇게 근대로 오면서 빤싯은 쌀국수, 달갈면, 혹은 녹두면ㆍ메밀면으로 만든 국수를 고기, 해산물 및 야채와 함께 볶은 국수를 통칭하게 된다.

그렇게 노동자들이 공장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길거리 노점에서 먹던 "빤싯"이 번듯한 식당에서 팔리게 되었을 때, 이 "빤싯" 전문점을 "빤싯테리아"라고 불렀다.

사실 이 명칭도 길거리 노점상에서 팔던 빤싯을 대량으로 팔거나 프랜차이즈화하여 고정 수입을 기대한 중국인 상인들에 의해 고안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렇게 중국과 스페인의 문화가 결합한 빤싯테리아는 음식을 팔고 소비하는 장소로서의 식당이라는 현대적 의미에 가까운 최초의 식당이 되었다.

초기의 빤싯테리아는 1594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이 세워진 지역인 마닐라의 비논도(Binondo)와 톤도(Tondo) 지역에 몰려 있었다.

중국인들에 의해 스페인 식민 통치시기에 전파되고 현지의 상황에 맞춰 변화해온 빤싯은 처음부터 패스트푸드이자 서민 음식의 성격을 갖고 있었고, 미국이 필리핀에 통치자로 상륙한 19세기 말부터는 필리핀 사람들의 "컴포트 푸드"로 자리잡기 시작한다.ᅠ

△필리핀 역사의 가닥 빤싯 : 총 7천640의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에서 빤싯의 대중화는 곧 다양화를 의미한다.

빤싯문화가 처음 시작한 북부 루손에서 남부로 전파되면서 지역민의 취향, 재료, 요리 기술, 소비 방식에 따라 현지화되었고, 지금은 모든 지역이 자신만의 고유한 빤싯 요리법과 풍미를 갖게 되었다.

가장 전통적이고 기본적인 빤싯 요리 공식은 면을 야채와 고기와 볶은 뒤 이를 필리핀식 간장인 "또요", 소금, 후추 등으로 간을 하는 것이다.

빤싯이 대중화, 그리고 현지화되면서 요리에 들어가는 면의 종류도 "깐똔"이라 불리는 달갈면, "비혼"이라 불리는 쌀로 만든 당면, 계란을 넣어 만은 "로미", "미끼", 일반 밀면과 비슷한 "미수아" 등으로 다양해졌고, 들어가는 야채도 당근, 강낭콩, 양배추 등 전통적으로 들어가던 재료 외에 피망, 차요테, 박, 수세미, 느타리버섯, 콜리플라워 등 지역 특산물부터 새로 소개된 품종까지 사용이 되어 다양한 풍미와 식감을 살리게 되었다.

필리핀 빤싯의 시그니처는 역시 필리핀의 라임으로 알려져 있는 "깔라만시" 한쪽을 면 위에 뿌려서 먹는 것이다.

비혼으로 만든 빤싯(출처 = dbgg1979, 위키미디아 커몬즈)
비혼으로 만든 빤싯(출처 = dbgg1979, 위키미디아 커몬즈)

들어가는 재료가 다양해진 것처럼 양념도 또요(간장) 외에 "빠띠스"라 불리는 피시소스, "바궁 알라망"이라 불리는 새우 페이스트, 굴 소스, 된장, 식초 등등으로 다양해졌다.

최근 한국 미식가들 사이에서 유명한 "코코넛 아미노스(Coconut Aminos)"라는 간장 대용 소스도 빤싯 요리에 종종 쓰인다. 일반 간장과 비슷해 보이고 맛도 간장과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코코넛 꽃에서 채취한 수액을 발효시킨 천연 조미료로 일반 간장보다 염분도 낮고 대두에서 나오는 글루텐이나 렉틴, 피트산 등이 없어 건강식으로 환영받고 있는 소스다.

이외에도 빅나이 베리로 만든 와인을 가미하기도 하면서 점점 빤싯은 가난한 사람들이 빨리 먹어 치워야 하는 음식이라는 과거를 뒤로하고 지역과 개인의 취향을 가장 잘 드러내면서도 기쁨, 안정을 주는 "컴포트 푸드"로 변모해왔다.

이런 배경으로 빤싯은 한국의 미역국과 같이 생일에 먹는 대표적인 음식이 되었다. 길게 뽑은 면이 장수와 건강을 상징한다는 믿음은 필리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필리핀에서는 대표 생일 음식이자, 필수 음식과도 같다.

장수와 건강이라는 상징성을 손상하지 않기 위해 생일날에는 면을 짧게 잘라서 먹으면 안 된다. 이외에도 마을 축제나 축하 행사가 있을 때는 적어도 하나의 빤싯 요리가 제공된다.

뉴욕 시내에 있는 필리핀 음식점에서 파는 빤싯(출처 = 라 시파나웡, La Sripanawongsa)
뉴욕 시내에 있는 필리핀 음식점에서 파는 빤싯(출처 = 라 시파나웡, La Sripanawongsa)

앞서 보았던 베트남의 퍼, 태국의 팟타이, 인도네시아의 미고렝과 같이 필리핀의 빤싯은 가장 흔한 음식이고, 가장 서민적 역사가 있는 음식이면서 동시에 필리핀이라는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면 요리들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어떠한 면 요리도 중국인들이 자기 고향에서 먹었던 방식 그대로, 그 맛 그대로 동남아시아에서 남아있지 않다.

타국으로 이주해 온 노동자들의 배고픔과 향수병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요리는 이제 동남아시아라는 제2의 고향에서 현지인들의 취향과 필요, 그리고 욕구에 맞춰 현지의 재료로, 현지의 방식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필리핀의 저명한 음식 작가인 도린 페르난데즈(Doreen Fernandez)는 "우리 삶에 있어서 면은 우리의 일상과 축제에 엮인 역사의 한 가닥"이라고 말했다. 빤싯은 필리핀 사람들의 일상과 역사를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완전한 필리핀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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