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속담 "찻주전자 하나 놓고 이야기 나누다 보면 한 마을이 탄생한다"

현시내 박사는 위스콘신 주립대에서 동남아시아 지역학으로 석사, 역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위스콘신주립대-화이트와터에서 조교수를 지냈다. 2020년 9월부터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태국의 냉전 시기 정치사와 국경지대의 소수민족문제, 미국의 냉전 시기 대동남아 정책을 연구해왔고,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글과 강연으로 나누고 있다.
현시내 박사는 위스콘신 주립대에서 동남아시아 지역학으로 석사, 역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위스콘신주립대-화이트와터에서 조교수를 지냈다. 2020년 9월부터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태국의 냉전 시기 정치사와 국경지대의 소수민족문제, 미국의 냉전 시기 대동남아 정책을 연구해왔고,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글과 강연으로 나누고 있다.

【서울 = 다문화TV뉴스】 현시내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태국을 찾는 전 세계의 배낭 여행객이 저렴한 숙소, 저렴한 여행 패키지, 그리고 저렴한 항공권을 구하기 위해 몰려드는 곳이 방콕의 "카오산 로드"다.

필자도 태국에 처음 갔을 때 이곳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렀었고, 2008년 학회에 참가하기 위해 다시 방콕을 찾았을 때도 카오산 로드 구석에 있는 "시크릿 가든"이라는 작은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닛"이라는 양곤 출신의 미얀마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20대 초반이었던 닛은 소위 "불법 이주 노동자"였다. 양곤에서 대학까지 나온 그녀가 어쩌다 카오산 로드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불법 이주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는지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떠듬떠듬 미얀마어로 대화를 시도했던 필자를 항상 반겨주었던 그 친구에게 정말 고마웠고, 무언가 보답하고 싶었다.

그래서 양곤에 곧 갈 계획인데 가족들에게 편지나 선물을 보내고 싶으면 전달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양곤으로 떠나기 전날 그녀는 급하게 나가서 산뜻한 선물들과 편지 한 통을 필자에게 주었다. 

양곤에 도착한 그날 저녁, 필자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닛이 적어준 주소를 보여주었고, 그 직원을 따라 닛의 집으로 갔다. 닛의 환한 미소를 닮은 그녀의 어머니와 두 여동생의 환대를 받으며 닛이 보낸 선물과 편지를 전해주고, 방콕에서 미리 현상해 둔 닛의 사진들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열흘 뒤, 방콕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는데 게스트하우스 직원이 나를 불렀다. 나가 보니 닛의 여동생들이 방콕에 있는 언니한테 가져다주라면서 정성스레 싼 꾸러미들을 건넸다. 그리고 나에게도 비닐 꾸러미를 하나 주었다. 열어보니 렛펫이었다.

양곤식 렛펫또(출처 = 와가운(Wagaung), 위키미디아 커몬즈)
양곤식 렛펫또(출처 = 와가운(Wagaung), 위키미디아 커몬즈)

미얀마 사람들에게 있어서 "렛펫"이라는 발효한 찻잎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일단 전 세계적으로도 찻잎을 발효해서 음식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이다.

중국에서 기원했다고 알려진 차를 마시는 문화는 16세기 이후 포르투갈 사제들이 유럽으로 가지고 오면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에, 중국어인 "차", 포르투갈어 "샤", 그리고 중국의 방언 중 "떼" 등이 지금의 "차"와 "티"라는 명칭의 어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기원과 상관없는 듯 미얀마에서는 차를 "렛펫"이라고 부른다. 물론 미얀마에서도 마시는 차 문화는 다른 여느 나라와 비슷하다. 시내 곳곳에 펼쳐진 노상 카페에는 거의 모든 테이블에 찻주전자와 컵이 있고, 그 주변으로 둘러앉아 신나게 수다를 떠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마치 더운 여름에 한강 공원에 앉아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켜는 사람들처럼 미얀마 사람들은 차를 마시며 사는 이야기부터 곳곳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정찰병들이 듣지 않았으면 하는 이야기들까지 나눈다. 그래서 미얀마에는 "찻주전자 하나 놓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을이 탄생한다"라는 속담까지 있다.

렛펫또도 태국의 파파야 샐러드처럼 미얀마 어느 거리에서나, 어느 식당에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음식이다. 렛펫또라는 음식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 일단 "렛펫"의 역사와 상징성을 알아보려 한다.

ᅠ△렛펫 : 미얀마의 "렛펫"은 녹차나 홍차, 우롱차만큼이나 그 역사도 유구하고 종류도 다양하다. 미얀마의 차 원산지이자 주산지는 중국과 국경을 마주한 샨주다. 고대 시대부터 샨주 토착민들이 어린 찻잎을 대나무 통이나 바구니에 넣고 발효시켜 먹는 것에서 발효차를 먹는 문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대 왕국들이 상좌부 불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종교의식에서나 공식 행사에서 주류 대신 차를 마시는 것을 권장하기 시작했고, 불교의 확산과 함께 차 문화도 미얀마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발효된 차는 왕국 간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분쟁을 해소하고 평화를 선언하는 의미로 교환되었다. 렛펫을 평화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전통은 계속 이어져 법원에서 평결을 발표하기 전에도 고소인과 피고인은 같은 접시에 담긴 렛펫을 먹음으로써 어떠한 결정이 나와도 따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또한 미얀마인들은 자신이 섬기는 "나"라고 불리는 토속 정령에게 발효된 찻잎을 제물로 바친다. 중매를 서는 이들도 긴 대나무 용기에 렛펫을 넣어 예비 신부집에 가지고 가 상견례가 끝나고 결혼식이 결정되면 이 대나무 용기를 열어 예비 신랑 가족과 함께 나누어 먹는다.

약혼식 당일에는 신부의 가족과 약혼식의 증인으로 초청된 일곱 명의 이웃에게도 렛펫을 선물한다고 한다. 그 외에도 성인식의 일환으로 소녀들이 귀를 뚫을 때나 마을 공식행사에서도 렛펫을 증정한다. 즉, 렛펫은 단순히 음식 재료로만 역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얀마 사회의 상생과 공존의 상징성 또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얀마 사람들은 종종 "모든 과일 중에서는 망고가 제일 맛있고, 모든 고기 중에서는 돼지고기가 최고며, 모든 이파리 중에서는 렛펫이 최고"라고 한다. 사실 아무리 가공하고, 밀크티처럼 우유에 시럽을 가득 넣어도 찻잎은 본래 쓴맛을 가지고 있어서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다.

렛펫이 그런 찻잎의 쓴맛을 극복한 방법은 바로 "발효"와 "절임" 과정에 있다. 잘 선별된 어린잎을 우선 5분간 찐 뒤에 이 중에서 다시 신선한 잎만을 고른 뒤 이를 항아리에 넣고 그 위에 돌을 얹어 물기를 완전히 제거해 준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선별되고 발효시킨 찻잎들이 완전한 "렛펫"으로 태어나기까지는 3-4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발효 과정에서 찻잎의 색깔, 질감(연성도), 그리고 산도가 바뀌게 된다. 발효 과정이 끝난 찻잎은 잘 씻긴 뒤 다시 한번 말린 뒤에 마늘, 고추, 소금, 레몬즙과 식용유 등으로 절여진다. 이 발효와 절임 과정에서 찻잎 특유의 텁텁하고 쓴맛이 자연스럽게 사라지기 때문에 차로 마시든, 샐러드로 만들어 먹든 거부감이 적어지는 것이다.ᅠ

치앙마이에서 먹었던 양곤식 렛펫또(출처 = 현시내)
치앙마이에서 먹었던 양곤식 렛펫또(출처 = 현시내)

△렛펫또 : 이러한 역사적,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해서 렛펫이 제사나 명절에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인 것은 아니다. 렛펫은 가정집에서 손님이 왔을 때 차와 함께 내어놓는 가장 대표적인 간식이기도 하고, 렛펫또처럼 조리된 음식은 흰쌀밥 위에 얹어 먹는 밥도둑이기도 하다.

태국의 쏨땀처럼 렛펫또도 지역마다 그 조리 방식과 재료가 다른데 대체로 만달레이식과 양곤식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앞서 말한 종교의식이나 공식행사에서 많이 쓰이는 만달레이식은 우리나라의 구절판과 같이 여러 개의 찬합이 들어있는 용기 가운데에 렛펫을 놓고 그 주변으로 참깨, 생마늘, 고추, 땅콩, 건새우 등을 놓는다.

이보다 더 일상식으로 유명한 양곤식은 이 모든 재료들을 섞어놓은 샐러드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미얀마어 선생님께 배운 조리법은 카놀라유나 땅콩기름과 같은 식용유와 라임즙에 렛펫을 절인 뒤 큰 용기에 절인 찻잎과 잘게 썬 양배추와 토마토, 생마늘, 땅콩, 깨, 건새우를 넣은 뒤 식용유와 피시 소스를 넣어 섞어 먹는 것이었다.

미얀마의 한 유명 작가는 "바삭한 식감이 느껴지는 재료와 부드러운 렛펫을 입 안에 넣고 천천히 음미하다가, 생마늘의 쓴맛과 고추의 매운맛이 느껴질 때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면 모든 의식이 완성된다"라고 말했는데, 렛펫또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난 표현인 것 같다.

생마늘의 쓴맛을 싫어하는 이들은 마늘만 따로 구워서 넣기도 하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마늘이나 쥐똥고추의 매운맛과 아삭한 식감을 좋아해서 아직까지도 미얀마어 선생님이 전수해주신 레시피대로 만든 렛펫또를 더 선호한다.

특히 아주 뜨겁지 않은 동남아시아에서 주로 생산되는 안남미(인디카 쌀)로 만든 가늘고 얇은 쌀밥 위에 이 렛펫또를 섞어 먹으면 송송 썬 갓김치에 참기름을 두르고 밥을 비벼 먹는 것 같은 식감이 나서 좋다.

열흘간의 짧은 미얀마 여행을 끝내고 필자는 방콕에 돌아와 닛에게 양곤에 있는 가족들이 보낸 선물 꾸러미를 건넸다. 열어보니 미얀마 요리를 하는데 필요한 향신료와 렛펫 패키지 위에 편지 한 통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편지를 집어 들어 읽는 닛의 볼 위로 굵은 눈물이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필자는 아직도 렛펫또를 먹을 때면 닛의 눈물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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